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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로운 생활

김 훈 칼의 노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2. 27.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

                                                   이순신


水國秋光暮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驚寒雁陣高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憂心輾轉夜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殘月照弓刀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칼의 노래>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경로는 신문도 아니요, 문학평론지도 아니고 이런 블로그 리뷰도 아닌, 엉뚱하게도 고등학교 시절 저녁 먹다가 틀었던 ‘도전! 골든벨’ 을 통해서였습니다. 드넓은 강당에 혼자 남은 도전자가 영광의 종을 울릴 것이냐 말 것이냐 두구두구 긴장되는 마지막 50번 문제! 바로 그 골든벨의 마지막 50번 문제의 정답이 김 훈의 <칼의 노래>였던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소설이길래 책제목이 골든벨 최종 문제로 나온단 말이냐, 하고 인상에 깊이 박혔던 그 때 그 소설은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결국 손에 들어와 완독을 하게 되었더랬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텅 빈 바다 위로 크고 무서운 것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각사각 사각, 수평선 너머에서 무수한 적선들의 노 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환청은 점점 커지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환청을 떨쳐냈다. 식은땀이 흘렀고 오한에 몸이 떨렸다. 저녁 무렵까지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
- 1권, p58


김 훈의 책을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특유의 무덤하고 건조한 문체입니다. 분명 좋은 소설의 조건에 ‘치밀한 감정묘사’ 따위의 항목이 있다고 배운 것 같은데 <칼의 노래>에는 슬프다, 기쁘다, 불안하다 등의 직접적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문장은 형용사와 부사를 있는대로 배제하고 내심을 숨긴 채 단정적인 풍경만을 그립니다. 이러한 문체가 기자라는 과거 직업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연륜한 나이에서 나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원고지에 직접 육필로 써내려가는 그의 사유의 속도에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만 어쨌든 보통의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인 것은 확실하지요.

예를 들어 이순신은 전쟁 중에 아들 면을 먼저 잃었습니다. 면의 부고를 받던 날, 하루 종일 혼자 앉아있던 이순신은 노을이 지는 소금창고로 가서 울음을 웁니다. 자식 잃은 통곡이 아니라 몸에서 치솟는 울음을 잇새로 악물고 참아내어 웁니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그 짧은 문장들의 나열이 어찌나 그리 서슬 퍼렇게 보이고 마음을 서늘하게 만드는지 놀랄 뿐입니다.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이야기는 여러 고전을 통해 전해오지만 <칼의 노래>가 유독 무게감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히 드러난 적뿐 아니라 조정과 임금이라는 ‘안의 적’에 부딪혀 안팎으로 고뇌하는 내면을 그렸기 때문일 겁니다. 서점에는 각종 인간관계론이 쌓여있고, 어디까지가 유들유들하게 융통성있는 처세이고 어디까지가 자존심없이 부화뇌동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세상입니다. 난세일수록 드러나는 인간의 진면목에서, 사방의 적들 가운데 시퍼렇게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한 위대한 인간의 기록을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겠지요.

나는 장계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김 훈

2001 '칼의 노래' - 동인문학상

2004 '화장' - 이상문학상

2005 '언니의 폐경' - 황순원 문학상

2007 '남한산성' - 대산문학상

소설가로서는 비교적 늦은 데뷔에도 불구하고 언론인 시절에 가다듬은 필력으로 장대한 서사를 다루는 역사소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전거 여행』(2000) 등의 산문을 통해서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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