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겨울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줄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보잘것없는 기억의 편린조차도 더없이 눈부신 순은의 반짝임으로 떠오른다. 인생에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왜 그토록 짧기만 한 것인가. 왜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왜 인간은, 자신이 기르는 개나 고양이만큼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인간은 지금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망각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보낸 시간보다는, 사랑한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몇 줌의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있는 자판들을 어루만지며, 나는 다시 그녀를 생각한다. 생각해
본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고 저는 ‘슬프네...’ 정도에서 끝이 났는데, 실제 딱 그 나이의 딸을 둔 젊은 아빠는 영화에서 어린 딸이 아빠와 헤어지는 장면을 보고 그만 통곡하고 말았더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하기야 추성훈씨 같은 파이터라도 영화를 보며 사랑이와 헤어지는 장면을 연상한다면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을거에요. 요컨대 영화나 소설, 드라마에서 어떤 감정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전적으로 개인의 경험치에 따라 다르고, 그러므로 나이가 들수록 소설을 마음으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어느 정도 맞다는 뜻이죠. 무슨 초등학교 논술시간에 나올듯한 당연한 얘기를 하느냐, 하시면 그 이유는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첫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첫사랑 이야기는 예외적이게도 위의 나이 법칙에 적용되지 않는 주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아름답게 미화시킨 가슴앓이가 하나씩은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사랑 이야기는 풋풋한 대학생이건 중년의 아저씨이건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첫사랑이라고는 했지만 건축학개론의 수지라던가 긴생머리 전지현을 떠올리시면 곤란합니다. 소설의 여주인공은 그런 첫사랑의 이미지와는 아주 거리가 먼, 메주를 반쯤 밟아놓은 듯이 ‘못생긴’ 여학생이기 때문이죠. 소설은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했던 ‘잘생긴’ 남자의 이야기. 남자의 아버지는 잘생긴 외모하나를 가꾸며 아내에게 기생하듯 무능력하게 살았으나 정작 배우가 되어 유명해지자 남자의 어머니를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잘난 얼굴 속에 그런 상처를 지니고 삽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나이는 열아홉, 스무 살로 그려져 있지만 흔히 떠올리는 철없는 청춘의 이미지는 결코 아닙니다. 상처받았으나 아주 순수하고 아련한 그런 인간상이죠.
소설은 기존의 양식과는 색다른 구조로 되어있어요. 남녀 주인공의 대사 처리에 색깔을 넣은 것, 말줄임표의 잦은 사용, 방점, 따옴표의 부재 등이 처음 읽는 독자를 약간 당황스럽게 만들지요. 처음에는 뜬금없이 느껴지다가도 하나 둘, 이야기가 넘어갈수록 점점 눈이 익고 호흡이 조절되는 사이 애잔함이 내려앉습니다. 문단끊기를 통해 천천히 시선을 늘였다 줄였다를 반복하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입니다. 주인공들의 나이나 단짝 형의 존재, 주인공들이 세상을 보는 태도, 서정성과 분위기 등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연상되기도 합니다만, 한국문학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절대적인 문학성이 결코 뒤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옛 향수에 호소하는 진부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군데군데 돋보이는 작가의 통찰과 묘사를 포함해서 순수문학으로 보기에도 감히 떨어지지 않는 작품성이었습니다.
어느 신문의 서평에서는 이 소설을 두고 자본주의와 사회 시스템의 오류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더군요. 부를 가진 몇몇 소수가 군림했듯이 이번에는 미(美)를 가진 소수와 외모 경쟁에서 뒤떨어진 자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식이었죠. 저는 기겁했습니다. 책을 읽고 받아들이는 바야 열이면 열 다르다고 해도 이 소설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구나. 사랑에 있어서 미와 추를 대조하는 것이 비단 자본주의만의 현상일까요? 클레오파트라도 제 피부를 지키기 위해 어린아이 오줌에 목욕을 했고 조선시대에도 여자들은 분을 빻아 얼굴을 발랐습니다. 소설을 꼭 거시적인 구조 속에서 분석하지 않으면 가치가 떨어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적어도 마지막 장을 넘긴 후의 먹먹함이 사라지기 전까지 분석이란 것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작품입니다.
어느 독자가 이 소설을 서정시(詩)같다고 써놓은 문구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한 편의 시를 읽은 기분입니다. 서정시. 시를 소설로 환생시킨다면 꼭 이런 느낌일 겁니다.
뭘요, 하고 나도 모르게 그녀처럼 짧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한 대의 차도 지나가지 않던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단지 바람이 멎었을 뿐인데도, 지구가 정지한 느낌이었다.
많은 눈물은 아니었지만 따뜻했던 그해의 봄이 응축된 듯 뜨겁고 뜨거운 눈물이었다.
고양이는 ‘그냥 생텍쥐페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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