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그 수면 아래 나머지 90%의 거대한 내공이 들어있는 것이 느껴지는 글이 있죠. 이 정도의 통찰력을 이 정도의 문장력으로 뽑아내는 정도라면, 이건 단지 작가가 반짝 운 좋게 공감시킨 한번의 좋은 문구가 아니라 다른 어느 작품을 읽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을 수준의 글을 보겠구나 하는 그런 느낌.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은 읽는 내내 몇 번이고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작가님의 ‘첫’ 장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참 놀란 기억이 납니다. 제 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기도 한 <새의 선물>은, 나이에 비해 ‘조금 많이’ 성숙한 열두 살 소녀 진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마치 연작 소설처럼 에피소드별로 풀어내고 있는 성장소설입니다. 사실 설정을 단지 열두 살이라고 했을 뿐이지 소설의 핵심은 주인공이 절대 열두 살의 감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어요. <아홉살 인생>처럼 순수한 어린이의 눈으로 어른의 세계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 세상을 함께 통찰하는 듯한 느낌을 독자는 받게 되지요. 그래서 작가는 이미 프롤로그의 제목에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못박아 둔 것일까요.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스스로 어린애임을 드러내 보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린애답게 보이는 것이다.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비상시에는 강력한 무기도 된다. 그런데도 아무런 이지적 노력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시간이 해결해주는 그 따위 신체적 성장을 남의 눈앞에 앞당겨서 보이려 한다거나 다만 금기라는 사실 때문에 본뜰 가치도 없는 어른 흉내에 매료된다거나 하는 것은 역시 봉희같은 어린애들만의 생각이다.
P78 데이트의 어린 배심원 中
(어른 흉내내기 놀이를 하는 친구들을 냉소하는 주인공. 열두 살 치고 정말 잔망스럽지요?^^)
일단 소설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술술 읽혀질뿐더러 ‘나 지금 웃긴 얘기 하는거야!’하는 식의 일차원적 개그가 아니라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나도 모르는새 미소가 떠오르게 만들죠. 그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에피소드 때문이기도 하고, 어린애라고 얕봤다가 속알까지 낱낱이 파헤쳐 관찰되는 어른의 우스움 때문이기도 하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감정 묘사에 동화되는 와중에 문득 주인공이 열두 살이라는 상황의 불일치를 깨닫는 순간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때 그 시절, 시골 어느 동네에서 이어지는 소소한 삶을 엿보는 듯한 따뜻함을 곳곳에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새의 선물>은 결코 따뜻함이나 해학에서 끝나는 마음 가벼운 소설이 아님을 독자는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주인공의 나이라던가 배경의 소박함, 사건의 소소함 등은 작가가 실제로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머릿속에 두루뭉술하게 펼쳐놓았던 감정을 마치 핀셋으로 집어 올리는 것처럼 기가 막히게 묘사하는 압권, 그것을 어린 진희의 입을 빌려 날 것 그대로 전하는 날카로움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의 선물>, 추천해요.
은희경
은희경의 작품들은 보잘것 없는 일상을 정치한 묘사를 통하여 생생하게 형상화해 냄으로써 인생의 진실에 다가선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잔잔한 문체와 서정적 분위기를 통해 일상의 미소한 사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그 속에서 삶의 진실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세계는 여성작가 일반에게 부여되는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일정부분 벗어나 자기 나름의 인간탐구를 보여주고 있어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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