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역할과 개념이 변화해왔다. 이 때, 이미지의 변화는 단순히 미학적 양식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기호를 해석하는 우리 시각 기준의 변화, 다양한 세계관의 변화를 뜻한다. 본문은 이렇게 다양하게 영향을 주는 이미지의 변화 양상에 대해 시대적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그 시작은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담론으로부터 출발한다. 르네상스 이전의 회화양식은 인물들이 평면적으로 그려졌으며 사회적 위계질서에 따라 크기가 정해졌다. 따라서 이미지에서 깊이감이 느껴지거나 사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도래되면서 ‘원근법’이 개발됐고, 중앙의 소실점으로 집중하게 하는 원근법을 구사한 작품들은 이미지의 깊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원근법의 회화 양식은 과학적이고 기계적인 시각을 강조했기 때문에 사실적인 묘사를 이뤄낼 수 있었다. 더불어 원근법의 탄생은 르네상스 시대의 세계관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원근법적 기법은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특정 시선을 필요로 하는데, 이 특정 시선을 모든 사람들이 소유 할 수 있게 함으로써 모두가 신의 위치에 설 수 있음을 뜻하게 된다. 한마디로 중세시대 때는 감히 넘보지 못했던 ‘신’의 영역을 ‘인간’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근법이 가미된 회화 작품들을 통해서 종교적 세계관이 크게 변화하고 있으며 과학의 가치가 대두되고 있음을 해석 할 수 있다. 또한 원근법을 통해 이미지 속 공간의 역할을 변화시키고 철학적 발전으로 이어져 데카르트적 공간이라는 개념까지 탄생시켰다. 요컨대, 원근법 시대를 시작으로 시각적 관찰의 중요성은 갈수록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기법으로 추앙받던 원근법에 대해 환원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의 재현이라는 반대된 평가도 있었다. 인간의 시각은 고정되지 않고 복합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데, 원근법은 단일한 시각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런 특징에 반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원근법의 시대인 과학혁명이 지나가고, 기계화와 기술의 발전이 급격하게 일어나는 시대가 왔다. 즉, ‘근대성’이 시작 된 것이다. 그리고 근대의 개인성, 관료제, 기술적 발전 등의 새로운 담론은 시각 테크놀로지 ‘사진술’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됐다. 사진은 사실적이고, 정확하게 세계를 표현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회화의 입지를 좁게 만들었다. 그러자 화가들은 사진과는 차별적이면서 인간의 복합적인 시각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탄생한 회화양식이 바로 ‘인상주의’다.
인상주의학파는 원근법의 전통을 부정하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담아내려했다. 가장 대표적인 화가는 클로드 모네인데, 그는 같은 장소에서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색채를 묘사하기 위해 그림을 여러 번 그렸다. 즉, 그에게 있어 본다는 행위는 활동적이고, 변화하며, 고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입체파’가 등장하게 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변화하는 빛과 색채에 주목했다면, 입체파 화가들은 시각의 위치에 주목했다. 같은 대상을 두고 다른 위치에서 동시에 봤을 때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복합적인 시각작용을 보여줬다. 이어 등장한 ‘추상 표현주의’까지 단일한 시점을 중시하는 원근법에 완전히 반하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유동적인 이미지를 표현함으로써 생동감을 부여한 것이다.
사진술의 출현과 영화의 발명을 바탕으로 모더니즘이 등장했고, 이미지에 대한 담론은 현저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매스미디어의 출현으로 ‘이미지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새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유명한 예술 작품을 따라 그려 단순히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쇄술과 사진술의 발달로 복사본을 생산해내는 세상이 도래했다. 20세기 초 독일의 비평가인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에세이를 통해서 이렇게 만연하는 복제품들이 오히려 원작을 더 돋보이게 한다고 서술한다. 그는 원작에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다고 말하면서 복사된 모조품은 원작의 아우라를 결코 따라 갈 수 없으며 원작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진정성이라는 개념마저도 재생산되고, 거래되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예를 들면,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은 영화나 엽서, 포스터 등으로 재생산되고 누구나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키치적 대상으로 활용된다. 심지어 컴퓨터 기술의 발전으로 예술 작품을 디지털화함으로써 원본과는 다른 고유하고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예술 작품에 디지털 미디어가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저작권과 예술 소유권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됐다. 누구나 쉽게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재생산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재생산된 이미지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해졌다.
그 밖에도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양식은 다양하게 이뤄졌다. 먼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작품 위에 뒤샹과 달리가 새로운 그림을 그려놓거나 뉴욕커라는 잡지에서 스캔들의 여성을 모나리자와 합성한 것처럼 기존의 작품을 ‘리메이크’하는 방식이 있다. 유명 원작을 리메이크함으로써 기존의 원작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현실의 문제에 적용해 새로운 해석으로 재생산 할 수 있다. 둘째로, 정치적으로 이미지를 재생산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치에 대한 대항 감정을 콜라주 작품을 대변하거나 에이즈 행동주의자들이 특정 상징 기호를 만들어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것 등이 있다. 즉,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이미지를 통해서 특정 개념을 사람들이 믿게 하고, 설득시키는 것이다. 또는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위해 기존의 상징을 전유하거나 약호전환 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을 창출하기도 한다.
이처럼 현상학적 관점으로 영상테크놀로지를 봤을 때, 이미지의 변화와 인간의 삶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텔레비전 같은 경우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는 이미지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전파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더 나아가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영화와 같은 여러 영상물에 나오는 이미지들의 기호를 통해 종교, 성, 정치 등의 다양한 담론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가상공간을 통해서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고 다양한 이미지 재현을 실현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점점 디지털 시각문화에 초점을 둘수록 회화와 같은 기존의 일차원적인 아날로그 시각문화에 대한 갈증이 커지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적어도 예술 작품에 한해서는 변화가 저지되고, 퇴행돼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컴퓨터가 만들어낸 시각문화는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지고, 화려하며 정교하다. 하지만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디지털로 만든 예술작품은 진정성이 부족하다. 그리고 더불어 피로감까지 느껴진다.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스마트폰 하나만으로도 매시간 디지털에 우리는 접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다가 우리의 마음에 휴식을 주고, 신선한 생각거리를 만들어주는 예술 작품까지 디지털로 만들어진다면 우리가 너무 획일화되고 제한적인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닐까 우려가 된다. 최근의 여러 박물관들의 전시를 봐도 알 수 있다. 새로운 화풍의 탄생이나 독창적인 작품들보다 기존의 작품들에게서 디지털을 가미해 더욱 화려하고 세련되게 만든 작품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지 않게 된다. 따라서 가까운 미래에는 디지털 시각문화만 판을 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아날로그적인 시각문화에 대해 아낌없는 투자를 해야 한다. 로마와 그리스의 문화를 그리워해 다시 르네상스라는 부흥을 일으켰던 것처럼 디지털 시각문화에는 없는 아날로그적 시각문화의 장점을 중시하고, 다시 일으키는 것이 이미지 재현의 또 다른 미래가 되길 바란다.
지금까지 잠시후도착의 이미지의 변화와 미래 포스팅이었습니다.
'*문화 > 잠시후도착의러브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버트 카파 사진전 감상문 (0) | 2014.01.21 |
---|---|
존 듀이의 자유주의 (3) | 2014.01.20 |
의미 부여에 따른 공간의 변화 (0) | 2014.01.13 |
영상으로 보는 정부의 정치적 의도 (0) | 2014.01.07 |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관람기 (2) | 2014.01.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