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얼마나 클까? 단순히 우리에게 시각적 자극을 이용해 즐거움을 주는 역할만 하는 것일까? 아니다. 생각보다 영상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 또한 이런 물음도 던질 수 있다.
우리가 접하는 영상은 정부와 무관한 것일까? 관계가 있다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이에 대한 설명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미국에 있다. 바로 매카시즘과 9.11테러가 미국 사회에 어떻게 전달됐는지에 대한 그 과정을 통해서다.
1950년대 미국은 전반적으로 반공산주의에 대한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로 인해 사회 체제가 전복당할 거라는 공포감은 자신을 지켜주는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지게 됐다. 즉, 국가가 제공해주는 안전성에 대해 감사히 여기고 자신을 공격할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애국자가 되는 것을 자청했다.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매체가 바로 ‘영화’다. 당시 정부는 영화에도 영향을 끼쳐 만일 정부가 원하는 방향과 어긋났을 때는 공산주의자로 치부하며 공격했다. 그로인해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여러 관계자들은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데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항상 그러하듯 이러한 세태를 꼬집는 용기 있는 자도 존재했다. <하이눈>이라는 영화가 그러하다. 이 영화는 보안관 케인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 산업의 관계자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행사하는 정부를 풍자한다. 마을에게 도움을 줬던 케인을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거라 계산되자 외면하고 희생양으로 전락시키는 과정은 영화 관계자들이 다른 동료들이 부정당한 이유로 숙청당할 때 외면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같은 맥락으로 영화<제 17 포로 수용소>도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정작 동료들의 안전에 아무런 위험을 끼치지 않았던 세프튼은 구타당하고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린 장본인은 안전을 책임지는 감시자인 프라이스였다는 모순은 매카시즘의 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 공산주의자나 동조자로 지목 받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반애국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을 감시하고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한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유린하는 형국이었다. 민주주의 국가라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국민의 안전이라는 명분을 이용해 국민을 탄압하고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와 같은 의문이 점차 강력히 제기되기 시작하자 영화 관계자들은 <굿 셰퍼드>와 같은 작품으로 상황을 비판하게 됐다. 그들은 트루먼 행정부가 공산주의에 대한 히스테리를 조장해 공포 분위기를 확산시켜 군수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있다고 봤다. 즉, 정작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힘은 미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결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군수 산업을 위해 ‘빨갱이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2001년에 발생한 9.11테러 이후에도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9.11테러가 발생한 이후 국민들은 테러 공포에 떨게 됐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이용해 언제든지 국가가 안전을 지켜주지 않으면 다시 테러를 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빨갱이 공포와 마찬가지로 국가와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 또 다른 특정 국가와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테러 공포를 조장할 때도 영화의 역할은 컸는데, <플라이트 93>이나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같은 작품들은 위기를 극복하는 미국 국민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에 대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고, 테러에 대항하여 똘똘 뭉치게 하는 동력이 됐다. 그러나 반면에 9.11 테러를 이용해 국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정부의 정치적 음모를 파헤치는 영화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한 <영화 심슨 가족>에서는 만화를 이용해 테러 이후 모든 국민들이 도청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풍자했다(이는 타 국가들을 도청한 혐의를 받고 있는 미국의 현 입장을 떠오르게 한다. 역시 음모론은 아무 혐의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밖에도 <랜드 오브 플랜티>, <화씨 9/11>, <루스 체인지>, <대통령의 죽음>, <로스트 라이언즈>와 같은 영화들이 테러 이후 정부가 국민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감시를 하며, 국민은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형국을 비판했다. 특히 에이버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루스 체인지>는 9.11 음모론에 대해 자세히 주장했다. 그는 음모론을 크게 두 범주로 나눴는데, 첫째는 정부가 일부러 방위체계를 약화시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성공시켰다는 이론이고 두 번째는 아예 정부가 직접 공격을 주도했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주장은 국가를 신뢰하는 국민의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진술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정부가 자신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 국민들의 권리를 짓밟는 상황을 감안할 때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만 볼 수 없다. 올슨 법무차관의 말처럼 정부는 중요한 이익을 위해 불완전하거나 거짓된 정보를 발표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안보가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항상 경계하고 준비해야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특정이념과 테러에 대해 과장된 방어 역할을 취함으로써 국민들의 권리와 자유가 침해당한다면 이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매카시즘을 소재로 한 영화나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가 계속 제작되고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재현된 인물들의 구도는 수용자에게 편협한 인식을 심어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국민을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까? 혹자는 정부의 의도가 깔려있는 작품들을 원천 봉쇄해야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역으로 표현의 자유를 막을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미국의 국민으로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국가가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일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막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정부의 의도가 투영된 작품이 상영하는 만큼 그 반대되는 입장의 작품도 상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가 답을 미리 정한 상태에서 국가에게 답을 선택하라고 하기보다 국민이 현 사안에 대한 입장을 자율적으로 취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용시켜 보자면,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의 상영을 언론까지 동원해 막았으면서 현재 제작중인 영화 <N.L.L.- 연평해전>는 옹호하는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반북감정을 이용해 국가 안보를 중시하게 만들고, 안보를 위해서라면 국민의 알권리,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들이 침해돼도 괜찮다는 논리를 대한민국 정부는 알게 모르게 실천하고 있다. 마치 미국이 테러에 대한 공포,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의 입장과 대등한 위치에 비판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설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변화를 이끄는 데 있어 언론인이 가져야 할 소양은 무엇일지 고민해봤다. 정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언론에도 압박을 가했고, 결국 언론은 한쪽 시각만 지지하는 편협한 매체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언론인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은 무엇인가. 모두에게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다. 정부의 압력이 있다 해도 민주주의 국가에 속한 언론이라면 국민들에게 진실을 전달할 의무를 다해야 한다. 국민들이 수용하는 영화와 같은 영상 속에서 사회 현실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 그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정부의 음모론에 대항 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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