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20세기 초반 철학자 존 듀이는 기존의 자유주의와는 다른 자유주의를 주장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듀이는 주목을 받지 못한 철학자였다. 그의 업적들은 무시 받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 평가받았으며 공리주의적 윤리나 칸트학파 윤리의 논쟁에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옥스퍼드대학 정치학 교수인 앨런 라이언은 듀이의 주장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으며, 현대 철학과 정치학에 희망을 준다고 주장하며 책을 펴냈다.
듀이는 다양한 방면으로 활동을 한 철학자였다. 진보주의적 교육의 선두자로서 여러 협회와 연맹의 창설을 후원하고, 교육개혁 관련 강연을 했으며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 민주주의적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정당을 창립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바쁜 가운데도 천 편이 넘는 논문과 책을 저술한 열정적인 학자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듀이가 그리 ‘인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수줍음이 많고 침착하고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게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존재감이 부족해지고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지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듀이의 사상이 지지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라이언은 듀이의 철학이 미국인들에게 현대사회를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끌어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대사회가 도래하면서 미국인들은 양자택일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과학과 종교, 개인주의와 공동체, 민주주의와 전문가 정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는데, 듀이는 둘의 구별을 흐릿하게 만들어줬다. 즉,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 신앙과 대립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개인주의는 공동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펼치는 것이라 말하고,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전문가처럼 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라 말함으로써 택일의 문제를 하나로 합쳐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주장은 미국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상들을 지킴과 동시에 현대사회의 새로운 사상들을 포용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듀이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입장은 ‘실용주의’와 ‘자유주의’다. 그런데,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실용주의와 자유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두 사상을 사용했다. 먼저 듀이가 실용주의에 대해 어떻게 접근했는지 살펴보겠다. 기존의 실용주의는 도덕적 원칙에 지배되지 않는 편의주의적인 주장이라 생각되어졌다. 하지만 듀이는 실용주의를 통해 철학자들의 진리 탐구를 설명하려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진리의 추구’도 궁극적 이상세계를 향한 질서와 지식 추구가 아닌 유용성의 추구를 말한다.
그는 철학을 궁극적인 현실과 관계 짓는 것을 허식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주장에는 의구심이 생긴다. 과연 기존의 진리 추구 방식이 실질적이지 않다고 단언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라는 주장이 실제적이지 않고 경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비록 행복이라는 개념이 추상적이고 유용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동물과 달리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행복은 꼭 필요한 개념이기에 실제적인 진리 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듀이는 현실에 유용하게 적용 할 수 있는 철학에만 집중하며 나아가 민주주의와 철학과의 관계의 밀접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민주주의를 철학보다 더 숭고한 이념으로 바라봤는데, 시민들 간의 커뮤니케이션과 토의를 촉진시키고 이성적인 집단행동을 위한 협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듀이는 민주주의가 가능성 있는 대안을 고려하고 공정하게 모든 아이디어에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과학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같은 맥락으로 듀이가 자유주의에 접근한 방법도 특별했다. 기존의 자유주의 정치이론은 실용주의와 반대되는 도덕적, 형이상학적 가정에 기초를 두었다. 존 로크와 칸트,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은 어떠한 정책과 주장을 펼치든 기본적으로 천부적인 권리에 위배 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대로 듀이는 자유주의의 이런 모습을 거부하고 정치이론의 기반을 근본적 권리나 사회계약에 두지 않았다. 그가 오로지 주목하는 것은 ‘개인의 역량을 깨닫게 하는 공동생활’이었다. 즉, 기존의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듀이는 공동생활에 초점을 맞췄는데 그 이유는 시민적 자유가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선 개인이 속한 사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가 중요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의 첫 번째 목표는 정의나 권리가 아닌 교육에 있다고 봤다. 교육으로 함께 공공생활에 참여 할 수 있게 하며 공공선을 이룰 수 있게 도모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주장을 읽다보니 듀이는 자유주의자보다 공동체 주의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듀이는 자유주의를 토대로 공동체 주의를 얹은 것처럼 말하지만 권리보다 공동생활이나 공공선을 중시하는 것을 봤을 때, 기본적으로 공동체 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에 대해 대답이라도 하듯이 라이언은 듀이는 적어도 전통적 자유주의 권리에 대해서는 확고히 인정했다고 덧붙인다. 듀이는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다수의 횡포로 인한 개인의 보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요구하는 법적 권리를 안전장치로 마련했다는 것이다.
한편 신실용주의를 제창한 프린스턴 및 버지니아대학 철학 교수인 리처드 로티는 듀이의 실용주의를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하는데 이용하려했다. 로티는 정치에 대한 담론에서 도덕과 종교와 같은 비전들을 철저히 배제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올바른 삶에 대한 개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하기 때문인데, 로티는 이런 그의 주장이 듀이가 주장하는 실용주의적 자유주의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는 공동생활이나 공공선과 같은 개념을 중시했던 듀이의 사상을 왜곡한 것이다. 듀이는 개인의 자유의 바탕에는 시민의 도덕적 품성을 계발하고 공익에 헌신하도록 하는 사회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정부가 가치의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했다. 나 또한 로티의 주장에는 허점이 있다고 본다. 만일 사회에서 도덕적 가치나 종교적 가치에 대해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그 사회는 혼란을 맞게 된다. 어떠한 기준 없이 개인이 하고 싶은 데로 자유롭게 행위 하게 되면 어떤 이는 남을 구타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없다고 보고 어떤 이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혼란스러워진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로티가 원하는 실용적인 결과 또한 낳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서 어느 정도 기준을 제시 해줘야한다고 생각한다.
듀이는 민주주의가 당면한 문제점의 원인을 공공생활의 와해로 보았다. 20세기 초반 미국인들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개인으로 보았다. 따라서 경제생활의 규모가 점점 커져 비인격적 조직들이 늘어나고, 새로운 형태의 소통과 기술이 발달해 방대한 연대망을 구축했지만 공공선을 위한 연대감은 갈수록 희미해졌다. 마치 페이스북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친구를 맺었어도 사이버친구 이상의 관계로는 발전 못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보니 대중은 점차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됐다. 따라서 듀이는 공동체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권리에 집착하는 기존의 자유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되, 그 바탕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중시하고 공동의 책임을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대안으로 현대사회가 당면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잠시후도착의 존 듀이의 자유주의 포스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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