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있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는 자신이 곧 병으로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마음속에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는 담담히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을 택했다. 여전히 자신의 일터인 사진관에서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찍는 일을 하며, 가끔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 짝사랑도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결혼을 했지만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색한 인사 뒤 그는 하지 못한 말들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가슴에 묻어둔 채 떠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랑은 언젠가 추억으로 그치기 때문에. 이렇듯 그는 조용히 세상살이를 정리하고 평소와 같이 살다가 생을 마감하려 했었을 것이다.
그러다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을 다녀오고, 곧 자신앞에 닥칠 현실적인 모습들을 마주하고 심란한 와중에 어느 주차단속 직원은 빨리 사진을 인화해 달라고 성화다. 가뜩이나 덥고 마음은 불편해서 쌀쌀맞게 손님을 대한 정원은 곧 미안함을 느끼고 아이스크림으로 그 직원에게 사과한다. 주차단속 일을 하고 있는 다림은 그 이후 자주 사진관을 찾아오면서 단골이 되고, 점점 정원은 다림과 가까워진다. 이렇게 정원의 마지막 인연은 시작되었다.
서로 호감을 가지고 계속 만남을 가지지만 우회적이지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다림에 비해 정원은 적극적이지 않다. 아니 적극적일 수가 없다. 그가 예상하는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다림은 미래를 그릴 수 있지만 정원은 그릴 수가 없다. 그저 그녀가 표현하는 것들을 정원은 그저 받아줄 수 있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는 동안 그의 마음 안에 그녀가 커져갔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한부 인생의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다소 신파적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이 영화는 꽤나 담담하게 그려간다. 보통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은 큰 절망 속에 빠지거나 자포자기한 채 삶을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정원은 세상을 초탈한 듯 담담하게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사랑이야기를 떠나 삶과 죽음에 대한 자세와 남겨진 것들을 두고 떠나는 사람에 대한 심리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영화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정원이 하루를 마치고 담담하게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하다 갑자기 흐느껴 우는 장면이었다.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아무 탈 없이 떠나려고 했었는데, 자신의 마음 속에 그녀가 들어왔다. 그 순간 조금씩 덜어내고 있었던 삶에 대한 미련, 애착이 다시 차올랐다. 아직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 좀 더 살고 싶어지는 마음이 다시 생긴 것이다. 자고 있는 친구에게 정원의 이야기를 하며 다림이 행복감에 젖어있던 그 밤, 정원이 자신의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슬퍼서 우는 장면은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배가시킨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한 기조를 유지한다. 후반부 막바지는 대사도 거의 나오지 않고 장면과 배우들의 표정, 몸짓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게다가 멜로영화인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나오지 않는다. 마치 극단적인 감정표현을 억지로 차단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잔잔한 전개방식이 거꾸로 더욱 크게 우리를 뒤흔든다.
결국 정원은 다림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쓰러져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창밖을 통해 보여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 가려 한다. 쓰러져 병원에 있는 동안 연락이 두절되어 다림이 기다리다 지쳐 편지를 사진관에 남기지만 정원은 답장을 쓰고 끝내 보내지 않는다. 이렇게 연락이 끊겨 흐지부지 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자신에게는 추억이 아닌 마지막 사랑이지만 다림에게는 추억으로 남는 것이 그녀에게 좋은 일일 것이라고.
정원이 죽은 뒤 겨울, 다림은 검은 옷을 입고 사진관에 나타나 자신의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빙긋 웃는다. 정원의 마지막 바램대로 다림에게 그가 좋은 추억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정원의 나레이션이 들리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내 기억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에게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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