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리뷰
-그들의 연애를 통해 본 운명적 사랑이란?-
‘500일의 썸머’는 참 많은 공감으로 다가왔다. 눈만 마주쳐도 설레던 순간은 어느덧 사라지고 상대에 대해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별을 선택한다. 모든 커플들에게 항상 있는 과정이다. 이 영화는 그 과정을 500일 동안의 변화로 보여준다. 영화 오프닝은 둘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둘의 심리를 파악해야 연애를 왜 그렇게 하는지 알 수 있는데, 어린 시절의 두 사람의 상황이 현재에도 심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때문이다. 톰은 어릴적 브릿팝을 들으며 순수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꿈꿨고, 썸머는 부모님의 이혼을 지켜보면서 운명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믿었다. 아마 어릴 때의 이 상처가 썸머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들에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원인이 된 것 같다. 둘은 성장한 후 만났을 때 이러한 심리의 차이 때문에 연애관도 달랐고, 그래서 충돌하게 됐다. 톰은 썸머가 자신이 찾던 운명이라 생각했기에 진지하게 연애를 하길 바랐지만, 썸머는 어차피 운명은 없는 거니깐 이번에 하는 연애도 가볍게 하길 원했다. 심지어 썸머는 톰과 같이 잠자리를 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연인사이가 아니라 친구사이라고 선을 긋는다. 그럴 때마다 톰은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점점 지쳐가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썸머를 욕한다. 톰은 오로지 썸머만 바라보며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지만 썸머는 자기 필요할 때만 이용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그래서 박태원의 ‘애욕’을 떠올리며 사랑하는 여자에게 상처받은 후에도 편지 한 장에 그녀에게 다시 달려가는 하웅의 모습이 썸머를 끝까지 잊지 못하는 톰과 닮았고, 남자를 농락하는 여자는 썸머의 모습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장면들을 찬찬히 다시 생각해보니 썸머가 결코 톰을 이용하거나 농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썸머는 항상 톰에게 먼저 다가갔다. 첫눈에 반한 톰이 초반에 제대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자기 판단만으로 썸머를 포기했던 것과 달리 썸머는 톰이 듣고 있는 음악에 대해 먼저 관심을 주면서 대화를 시도했다. 또한 건축을 하고 싶지만, 애써 억누르려고 했던 그에게 손목에다 건물그림을 그려달라며 다정한 관심을 준 것도 썸머였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썸머가 앞서 말했듯이 사랑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운명이 있다고 말하는 자신과 생각이 완전 다른 톰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톰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증명 할 기회를 주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썸머는 말로는 자신에게 톰은 연인이 아니라 친구일 뿐이라 했지만 사실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깨고 친구의 개념을 넘어설 수 있는 톰의 모습, 진짜 사랑을 자신에게 주는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썸머가 직접 톰에게 자신의 운명이라서 결혼을 했다고 말한 남자가 썸머에게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먼저 질문을 하며 다가간 남자라는 것이 그 근거다. 즉, 그녀는 엄마와 아빠의 관계를 통해 사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부모님이 했던 가짜 사랑 말고 운명의 진짜 사랑을 찾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썸머는 연애 주도권은 남자만 잡았던 과거 분위기와 달리 자신의 연애에 대해 적극적이고 주도권도 잡는 능동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모습은 ‘이혼 고백장’에 나오는 나혜석을 연상케한다. 자신의 가치관, 자신의 주장에 대해 거리낌없이 말하는 모습이 썸머와 닮았기 때문이다. 이혼 고백장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썸머를 보면서도 그녀가 멋있다고 느꼈다. 더 나아가 동경의 대상으로까지 보였다. 그건 아마도 내가 평소에 능동적인 여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연애를 꿈꾸는 이유는 썸머의 ‘구속받는 게 싫어’라는 대사처럼 서로 얽매여있지 않는 연애가 개인의 행복을 더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연애관은 오로지 쾌락만을 목적으로 하는 연애가 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친애’에 대한 정의를 보면 유용성을 목적으로 한 친애, 쾌락을 목적으로 한 친애는 완전한 친애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한 친애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주는 유용성과 쾌락이 사라지면 둘 사이의 친애도 끝이 나는 단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친애는 당사자에게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썸머가 과거에는 자신을 구속할 거라고 결혼을 거부했지만, 결국엔 받아들이게 된 이유도 완전한 행복 때문일 것이다. 자유로운 연애보다 서로에게 약간의 구속이 있더라도 서로에게 의지하고 책임을 갖는 연애가 더 완전한 행복을 준다. 따라서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연애를 주도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만 그녀가 초반에 말했던 구속 없는 사랑의 부정적인 면모는 간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톰과 썸머의 연애관을 비교해봤을 때 지속적인 사랑을 꿈꾸는 톰의 연애관이 자신과 상대방에게 더 큰 행복을 줄 수 있는 연애관이라 결론지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톰의 연애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가 지속적인 사랑을 꿈꿨다면 그에 따른 노력을 했어야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먼저 다가가는 것은 톰이 아니라 썸머였다. 썸머는 처음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끔씩 자신의 도발적인 행동도 받아주는 톰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찬찬히 생각해보면 둘의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만일 톰이 항상 수동적인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썸머에게 다가갔더라면 그들의 연애는 달라졌을 것이다. 영화는 썸머의 관심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기껏 해봐야 음악뿐이다. 그녀가 읽는 책이 뭔지, 그녀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가 뭔지 질문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면 썸머는 톰에게 마음을 더 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이 이별을 하게 된 이유는 서로 상호보완을 해주는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톰이 원하는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감정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연애관의 허점이다.
이처럼 허점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의 연애관은 500일간의 둘의 만남을 통해 서로 영향을 준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었던 톰과 운명적인 사랑은 없다고 믿었던 썸머의 입장이 서로 반대가 됐다. 톰은 운명의 여자라고 믿었던 썸머가 결국 자신을 떠났기에 그렇게 되었고 썸머는 자신과 결혼하는 상대 때문에 운명을 믿게 됐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서로에게 “너의 말이 맞았다”라고 말한다. 난 두 사람의 의견 모두 맞다고 생각한다. 운명은 없다. 그러나 기회는 있고, 이 기회는 운명을 만들 수 있다. 톰이 썸머에게 기회를 부여받았을 때 그 기회를 잡았더라면, 썸머도 톰처럼 톰이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썸머와 결혼한 남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면 썸머는 이 사람이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은 타이밍이다’라는 말이 이런 상황을 두고 생긴 말이라고 생각한다. 기회를 잡는 것, 그리고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서로를 채워주는 운명적인 사랑을 실현하는 방법이며 지속적인 연애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다. 톰이 어톰이라는 새로운 여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기회를 붙잡음으로써 새로운 1일을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잠시후도착의 <500일의 썸머> 리뷰 포스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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