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왕’으로 바라본 인간의 본성
‘파리 대왕’은 책으로 처음 접했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나는 매우 무서워했었다. 평범한 소년들이 무인도에서 생활함으로써 악하고 잔인한 모습을 보이며 서로 살인까지 한다. 만약 이런 내용이 현실 속에서 절대 일어날 일 없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 내용이었더라면 그리 무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대학교 동기들과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이 책의 내용과 같은 잔인한 일들이 충분히 펼쳐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더 무서웠다. 그래서 연극을 보는 게 꺼려졌다. 상상하지 않으려 했던 그 장면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을 보는 내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운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무인도에 떨어진 아이들이 점차 변화하는 과정 뿐 아니라 무대 연출까지도 색다르고 흥미로웠다. 그래서 예상과는 달리 극의 전개 과정보다 무대의 연출에 먼저 주목하게 됐다. 연출가는 무대장치로 ‘커튼’을 중점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커튼을 이용한다고 해봤자 등장인물들을 숨기는 정도로만 사용 될 줄 알았는데, 첫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 연출 됐다. 넘실거리는 파도를 커튼으로 표현한 것이다. 파도 소리에 맞춰 커튼은 넘실거리고 바퀴달린 판을 이용하여 파도에 쓸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연출했다. 이윽고 커튼은 붉은 조명을 이용하여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고, 커튼에 손가락으로 찍어 멧돼지 머리에 꼬인 파리 떼가 되며 또는 커튼에 신발을 갖다 대서 모래사장에 찍히는 발자국이 된다. 어떨 때는 커튼을 분할 시켜 등장인물의 내적갈등을 표현했다. 이런 연출 하나 하나가 나에겐 엄청난 신세계였다. 어떻게 커튼 하나를 가지고 저렇게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저런 무대연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대단했다. 최근까지 봤던 대학로 연극에서는 못 느꼈던 배우의 진정성이 연기에서 묻어나는 것 같았다. 특히 등장인물들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본래 가지고 있었던 성격이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연기로 잘 표현해냈다. 책으로 보면서 이런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상상했던 모습을 눈앞에서 직접 보니깐 신기했다. 전체적으로 무대는 완벽했고 만족스러웠다.
마찬가지로 극의 내용 전개도 흥미로웠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극에서도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선과 악에 대한 질문과 사회적 관습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계속 한다. 연극이 끝난 뒤에 배우와의 대화 시간에서 듣기로는 연출가가 인간의 본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싶어 했다고 한다. 즉, 사회적 관습에 얽매어 질서에 맞게 딱딱 살아가는 것보다 인간의 본성에 더욱 주목하자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원작보다 더 잭의 비중이 크게 느껴졌었다. 잭은 랄프와 대결 구도로 나온다. 회의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고 구조 받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는 랄프와 달리 잭은 무인도에서 어떻게 먹고 살지가 더 중요하며 사냥을 즐긴다. 그러다가 잭의 사냥은 멧돼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지 않는 아이들에게까지 향하게 된다. 잭이 랄프에게 절벽에서 손을 잡아 줄 때 “밑을 봐 아득하지? 위를 봐 까마득해.”라는 대사가 인상 깊었는데, 이는 잭의 변화를 암시하는 듯 했다. 처음에는 그런 잭의 변화가 못마땅했다. 오로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친구를 죽이고, 잔인한 행동을 일삼는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오히려 랄프보다 잭의 모습이야 말로 나와 닮았다고 느끼게 됐다. 난 바깥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 잭 못지않은 악한 본성을 갖고 있다. 특히 통학하는 길에 자주 느낀다. 2시간 내리 서서 지하철과 버스를 탈 때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진다. 하지만 이건 내 마음속의 소리일 뿐 겉으로 나타난 내 표정은 담담하다. 어쩌면 이렇게 숨기는 내 모습이 더 비겁하고 잭이 랄프에게 말했던 것처럼 겁쟁이의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겁쟁이가 되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잭은 이를 전면 부인하는 캐릭터다. 그는 랄프가 주장하는 모든 규칙들을 무시하고 자기가 느껴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간다. 랄프도 속으로는 꿈틀대지만 애써 참았던 욕망들을 잭은 거리낌 없이 표출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잭이 친구를 실제로 죽이고 또 죽이려 계획했던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용기는 매력적이었다.
랄프와 잭 외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성격 하나하나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절대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지식인의 표상인 피기, 박쥐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붙는 쌍둥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죽음을 당한 사이먼, 랄프를 잘 따랐지만 살기 위해 변하는 퍼시벌 등 배우들의 호연과 더불어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었다. 이중에서 나는 사이먼이라는 캐릭터가 인상 깊었다. 선과 악, 사회관습과 인간의 본성으로 나눠지는 다른 캐릭터들과 다르게 사이먼은 마치 이 모든 것을 통찰하며 바라보는 절대자의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괴물의 존재에 떨고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진짜 괴물은 우리 자신’이라고 말한다. 관습에 꽁꽁 묶여 있을 때는 자각할 수 없는 그들의 본성을 애초부터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아이들이 두려워하던 공포의 대상이 조종사의 시체라는 것도 사이먼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임을 당한다. 마치 순교자를 상징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이먼은 유일하게 파리 대왕과 대화를 시도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사실 ‘파리 대왕’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뚜렷하게 정의하기가 어렵다. 표면적으로는 죽은 멧돼지의 머리에 파리가 꼬인 것을 나타낸다. 나름대로 파리 대왕을 해석하자면, 다양한 함축된 개념이 녹아 있겠지만 특별히 ‘인간의 악한 본성’을 가장 주되게 나타낸 것이라 생각한다. 멧돼지가 머리가 잘리게 된 이유는 잭의 ‘사냥’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냥은 인간의 잔혹한 본성을 나타내는 행위다.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멧돼지를 찌르고 때려서 죽인다. 인간의 폭력성의 결과물이 돼지 머리 시체다.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았던 본성이 깨어났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후에 사이먼을 찔러 죽일 것을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하다. 사냥에 눈이 먼 소년들은, 즉 인간의 악한 본성에 의해 행동하는 소년들은 멧돼지를 찔러 죽인 것처럼 사이먼을 찔러 죽인다. 이는 악한 본성만이 팽배했을 때의 참혹한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 잘 알려준다. 인간의 본성에는 악한 본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 같은 선한 본성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 본성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서로를 죽이게 되는 혼란스러운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극에서는 파리 대왕 같은 악한 본성을 보여주는 소재를 배치해 둠으로써 인간의 선한 본성의 부재와 중요성을 더 강조시키는 효과를 얻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출자는 끝까지 인간의 악의 본성을 강조하려는 듯 원작과는 다르게 결말을 내렸다. 잭이 끝까지 무인도에 남게 한 것이다. 원작에서는 한 명의 아이들도 빠짐없이 구출되며 어른이 등장했을 때 모두 울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연극에서 잭은 구조 받고 싶지 않으며 끝까지 랄프를 죽이려는 욕망을 드러냈다. 개인적으로는 어른이라는 더 커다란 사회적 관습이 다가온 순간 사회 속으로 다시 흡수되어 버리는 원작의 결말이 더 충격적이었고 맘에 들었지만, 연극의 결말도 나름 설득력 있는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 속에 흡수 된다고 해도 언제든지 다시 마주칠 본성이다’라는 외침이 더욱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잠시후도착의 연극 <파리대왕> 감상평 포스팅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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