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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얼간이 감상문 - 삶 속에서 혁명을 꿈꾸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2. 14.

영화 <세 얼간이> 감상문 

- 삶 속에서 혁명을 꿈꾸다


 그동안 난 ‘혁명’이라는 단어는 기존의 것들을 한 번에 모두 뒤집어 버리는 파격적인 행위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세 얼간이’를 보면서 혁명에 대해 다시 정의 내리게 됐다. 혁명이란, 기존의 것을 단숨에 엎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관습을 향해 과감하게 질문을 던지는 사소한 행동이 바로 혁명이다. 당장의 변화가 없더라도 변화를 위한 작은 움직임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영화 ‘세 얼간이’에서 이러한 행동을 보여준 인물은 ‘란초’였다. 그는 기존의 관습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과감히 던졌고, 이런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주변 친구들’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교육 시스템’으로까지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었다. 

 영화의 배경은 인도의 유능한 인재들만 모이는 일류 명문대 ICE다. 여기서 ‘일류 명문대’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명문대가 있다면, 그와 반대인 지잡대(지방에 있는 잡대학)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들은 지잡대로 들어가면 사회의 낙오자로 낙인찍힐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경쟁을 하고 마침내 명문대로 들어간다. 그런데 명문대로 들어간다고 해서 경쟁이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대학 내에서 취업을 위해 또 다른 경쟁이 시작된다. ICE대학 학생들이 그렇다. 대학교 총장은 신입생들을 모아놓고, 뻐꾸기 알을 보여준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새의 알을 떨어뜨리는 잔인한 생존방식을 예로 들어서 학생들이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즉,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남을 밟고 일어서야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모든 학생들이 총장의 말에 순응한다. 나 또한 그랬다. 중학교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고등학교 입시에 대한 두려움은 날로 커졌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는 나를 짓눌렀고,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마주치게 될 실망스러운 표정이 너무 두려웠다. 하지만 이렇게 괴로운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딱히 싫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미 정착된 사회 분위기가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아마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미리 포기하고 질문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명, 란초만은 그런 교육 시스템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다.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교육 시스템이 운영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는 미리 답을 정해놓고 그것에 맞춰서 학생들을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권장하는 시스템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총장은 그런 란초의 생각이 너무나 이상적이라고 비판한다. 사실 총장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경쟁사회는 지치고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경쟁사회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저 순응하는 게 답이었을까? 도망갈 수 없다면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은 아닐까? 라고 말이다. 초등학생 때부터(요즘은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늘 경쟁을 하며 살아왔다. 다음 단계로 진학 할 때마다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어야 했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물에 성취감을 느끼며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이 과정 속에서 소외감과 자괴감을 느끼며 수많은 문제점에 부딪쳤다. 이렇게 수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은 현재의 교육 시스템이 잘못 구조화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고쳐야 하는 게 올바른 순서다. 다가갈 수 없는 이상세계라고 치부해버리고 시도조차 안하는 것이 진짜 비겁한 도망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바꾸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구조화되어버린 사회에 의문을 제기 했을 때, 돌아올 타박과 야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영화 속 학생들은 이런 두려움 때문에 란초처럼 질문하는 것을 망설인다. 반면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 내내 란초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란초는 남들이 그냥 쉽고, 편하게 원래 있는 길로 걸어가라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질문하고, 저항했다. 영화 초반부에 신입생 신고식만 봐도 그렇다. 신입생의 기를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선배들에게 엉덩이를 보이고 모욕을 당하는 이 행사는 누가 봐도 분명히 악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런 행사에 항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때, 란초는 자신의 방문 앞에 오줌을 갈기는 선배를 골탕 먹이는 방식으로 악습에 대해 저항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 곳에서도 악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보다 한두 살 더 많은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새벽 한시까지 벌을 세웠고, 사감 선생님의 생일날이나 스승의 날에는 강제적으로 선물과 편지를 준비하게 했으며, 편지는 검열 받은 후에 올라가는 등 지나친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환경이었다. 그 환경 속에서 당연히 우리는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껏 해봐야 울거나 우리끼리 욕하는 것이 다였다. 잘못 낙인 찍혀 퇴사라도 당하게 되면 불이익은 나만 받는 거라 생각했고, 이미 오랫동안 정해진 관례이기 때문에 나 같은 고등학생이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 환경 속에 적응해가는 것을 택했다. 부당한 벌을 받을 때도 그냥 묵묵히 견뎌냈고, 나중에 내가 선배가 됐을 때는 받은 만큼 갚아주겠다는 마음으로 후배들에게 무섭게 대하는 나를 발견했다. 결국 난 부조리한 사회 구조 속에 완벽히 적응한 구성원이 돼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때 깨달았어야 했다. 틀을 벗어나기를 무서워해서 두려움을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악순환의 연속이 계속 될 것이라는 것과 란초처럼 선배를 직접적으로 골탕 먹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잘못된 점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선한 방향을 위한 혁명의 중요한 첫걸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수많은 장애물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란초의 친구인 라주와 파르한은 장애물들을 견뎌내 마침내 두려움까지 극복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란초의 영향을 받아 혁명의 첫걸음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란초보다도 라주와 파르한이 더 존경스럽고 마음이 더 간다. 지금의 내 모습과 가장 닮은 캐릭터고, 또 앞으로 닮고 싶은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라주와 파르한은 원래 저항하지 않고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기존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끼고 힘들어했기 때문에 란초가 총장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재밌어했다. 하지만 막상 직접 실천에 옮길 용기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란초와 그들이 처한 환경은 확연히 달랐다. 먼저, 란초의 아버지는 상당한 부자였지만 라주와 파르한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또 셋이서 함께 놀아도 란초는 항상 1등만 하는 우등생이었지만 라주와 파르한은 꼴지를 면하지 못하는 매우 안 좋은 성적을 받은 상태였다. 참 이상하다. 내가 고등학생 때도 란초 같은 친구가 있었다. 자기는 공부하는 게 싫고, 따분한 교육 시스템이 재미없다고 야자를 한 번도 안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다. 그래서 성적 결과를 볼 때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고 느꼈었다. 나도 제처럼 똑똑하면 따분한 교육 시스템에 대해 당당하게 반기를 들 자격이 있을 텐데, 왜 나는 이 모양일까,하고 말이다. 라주와 파르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란초와 출발점이 달랐다. 그래서 란초처럼 행동 할 수 없었다. 이 대목과 관련된 영화 장면을 보면 ‘친구가 낙제를 하면 눈물이 나고, 친구가 1등을 하면 피눈물이 난다’라는 라주의 대사가 나온다. 아무리 친한 친구이지만 나보다 잘나면 얄미워지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그래서 라주와 파르한은 란초와 어울리면서도 란초가 저렇게 이상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살고 있는 환경이 이상적으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미리 선을 그었다. 그리고 총장은 이런 심리를 더욱 더 이용해 란초를 고립시키려고 시도한다. 

 총장은 ‘경쟁’이라는 시스템이 가장 완벽한 구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그렇게 성장해왔고, ICE 대학 또한 이렇게 명문대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란초가 등장하면서 그의 논리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란초는 총장에게 말한다. 현재 인도의 자살률은 1위라고,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고 말이다. 그리고 총장이 ICE 대학을 1위로 만들었다고 말하자, 란초는 1위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발명에는 관심이 없고 점수, 취업에만 관심 있다며 공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점수 잘 받는 방법에 대해서만 배우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장면은 마치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비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에서 국어시간에 시를 배울 때 우리는 어떤 시가 기출 됐는지, 이런 시에는 어떤 형태로 문제가 출제 되는지에 대해 배운다. 시인이 어떤 생각으로 이 시를 썼고,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상할 시간이 전혀 없다. 오직 점수를 더 받는 것이 남는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 슬픈 현실인데, 영화 속 총장은 전혀 그 상황을 슬프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높은 곳을 가기 위한 하나의 시련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이 지켜온 신념을 겨우 신입생 한 명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른 학생들이 선동되지 않게 란초를 고립시키기 시작한다. 먼저 라주와 파르한의 가난한 집안 형편을 가지고 그들을 옥죄었다. 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총장의 모습 자체가 그의 신념이 틀렸다는 것을 반증하는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가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다면 총장이 나서서까지 란초를 고립시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란초의 말이 옳기 때문에 무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총장은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신념이 옳다고 할 수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간다. 총장은 경쟁을 통해 성취하는 삶이 행복해 질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경쟁 논리는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놓는 비극을 낳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이 자기 자신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은 자신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대학의 학생까지 죽음을 선택하는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였다. 그래서 그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었다. 그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라주와 파르한은 총장보다 더 빨리 이 변화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먼저, 두 사람은 란초의 친구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에 감동 해 더 이상 얄미워하지 않고 란초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게 됐다. 그리고 왜 자신들은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구질거리는 삶을 살아야 하냐는 질문에 란초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첫째로, 라주에게는 왜 자신을 믿지 못하냐고 묻는다. 라주는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에 여러 미신들을 믿으며 그것들에게 의존한다. 그래서 매일 신에게 기도를 하며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간다. 때문에 란초는 라주에게 공학의 길을 걸어가려는 자신을 굳게 믿고 모든 미신들을 물리치라고 충고한다. 둘째로, 파르한은 ICE대학을 선택한 것 부터가 잘못됐다. 파르한이 진짜 원하는 삶은 공학자가 아니라 사진작가의 삶이기 때문이다. 즉, 파르한이 가고 있는 길은 자신의 아버지가 원하는 길이다. 따라서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가 없는 데 공학 공부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란초는 파르한이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당당히 말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요컨대 두려움을 없애는 자신의 혁명을 이뤄냈을 때, 진정한 행복에 도달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라주와 파르한은 란초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라주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살겠다는 포부를 면접에서 보이고 취업에 성공했고, 파르한은 부모님을 설득 해 사진작가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들이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는 하나의 혁명일 것이다. 그리고 이 혁명은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란초의 사소한 질문으로부터 비롯됐으며 결국 혁명으로 인해 진정한 행복을 되찾게 됐다. 

 그렇다면 총장은 진정한 행복을 어떻게 얻게 됐을까?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의 딸이 란초의 지휘 하에 아기를 무사히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란초는 공부를 할 때,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공부했기 때문에 아기를 더 편하게 낳는 데 도움을 주는 진공 시험관을 그 자리에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류 명문대의 대학 총장인 그는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마 사랑하는 자신의 딸에게 아무것도 못해주는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이 여태까지 살아온 신념에 대해 회의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이를 무사히 순산하는 데 성공한 란초를 보면서 자신이 틀렸음을 완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 그는 그 때서야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됐다.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아기에게 그는 ‘훌륭한 공학자가 되어라’라는 말 대신 ‘발차기 바라! 축구선수가 되려나 보다. 너가 원하는 걸 하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자기 자신도 편안해짐을 느낀다. 처음으로 오직 행복을 위한 삶을 대면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을 다 마치고 학교를 떠나려는 란초를 붙잡고 총장은 울면서 훌륭한 학생에게 주려고 했던 볼펜을 전달한다. 이 장면은 란초로부터 시작된 두 번째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ICE 대학의 교육시스템의 신념을 대변하는 총장이 그의 생각을 인정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그 다음 날, 경쟁 시스템이 하루만에 붕괴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경쟁으로만 교육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 다는 것을 총장이 인지하게 된 것은 엄청난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란초는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도 혁명을 이뤄냈다. 다시 영화 초반부로 돌아와, 라주와 파르한은 자신들이 란초와 애초에 처해진 환경부터 다르기 때문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란초는 그들보다 더 안 좋은 상황 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해낸 인물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하나의 반전 장치로 ‘란초의 비밀’을 등장시킨다. 란초는 사실 라주와 파르한보다 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성장한 캐릭터였다. 그의 이름은 원래 초테이며 가난한 정원사의 아들이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 몰래 수업을 들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배우고자 하는 열정을 표출한 것이다. 교복을 빌려 입어 몰래 수업을 들으면서 공부를 했는데, 그 모습을 들키게 됐고 결국 란초라는 부잣집 도련님 대신에 대학까지 오게 됐다. 어떻게 보면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란초 또한 완전한 행복을 찾았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열악한 자신의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지 끊임없이 노력했고, 기존의 구비된 시스템에 대해서 당당하게 도전했다. 그러므로 란초는 자기 삶 속에서도 혁명을 이뤄냈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은 세상을 뒤집어 버리는 대단한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을 꿈꾸고, 노력하는 것이 혁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을 거대하게 생각해서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시 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당장 나부터 혁명을 시작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모습을 바라봤을 때, 그동안의 나는 무언가에 대해 질문하거나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정신적인 압박을 줬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면서도 반발하지 않고 수긍했기 때문에 기존의 사람들도 예전과 똑같이 행동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기존의 체제가 너무나도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벗어나길 두려워한 겁쟁이였다. 그래서 내가 왜 이렇게 겁쟁이가 돼버렸을까 생각을 하다가 내가 여태까지 해 온 ‘공부’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됐다. 나한테 공부라는 것은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시험을 보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시험을 보고나면 정말 신기하게도 모두 잊어버리고 만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줄기차게 외웠던 수많은 수학 공식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린 게 대표적인 예다. 또 대학생이 된 지금 우리나라 역사나 정치 기구에 대해서 물어보면 꽤 높은 점수를 받았던 과목의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대답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끔씩 나는 도대체 뭘 배웠던 걸까하고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물론 우리나라 입시생들을 이런 식으로 공부하게 만든 교육 제도의 문제가 1차적으로 가장 크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원하는 데로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 데, 성적까지 잘 나왔던 친구를 예로 들어보겠다. 그 친구가 정말 내가 봤던 것처럼 하루 종일 놀기만 했을까? 아니다. 란초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를 보면 란초는 수업에서 쫓겨나면 다른 수업을 바로 들으면서 끝까지 배우려는 열정을 놓치지 않았다. 내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는 항상 책을 읽었다. 시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학문을 쌓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노력했고, 학교 공부도 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공부했다. 한마디로 마음가짐이 나와 달랐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란초는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때에 우리가 원하는 성공도 뒤따라온다고 말한다. 이 말이 나에게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다. 주변 사람들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닌, 진정 나를 위해 살기 위한 변화가 내 안에서 시작 된 혁명이었다. 



 그리고 찬찬히 내 삶에 있어, 앞으로 시작 될 혁명에 대해서도 계획하게 됐다. 영화에서 라주는 독립적인 자신의 삶을 되찾게 됐고, 파르한은 사진작가의 꿈을 이루면서 행복을 이어갔다. 그리고 란초는 자신의 배움을 바탕으로 수많은 발명품들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 시스템을 실현하는 학교를 세웠다. 그래서 그들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렇다면 내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꾸준히 내 안에서 혁명을 이뤄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가장 먼저, 내 진로를 정하는 데 있어서 누구의 의지도 아닌 나만의 의지로 선택을 할 것이다. 대학교 2학년도 점점 끝나가는 요즘 점점 진로에 대한 고민이 다가오고 있다. 고등학생 때 까지는 기자로 활동하다가 앵커로 되는 것이 나의 뚜렷한 진로 방향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을 들어오고 나니 내 꿈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말로 내가 기자로 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진로 방향을 생각했다. 무대 감독, 음악 감독, PD, 라디오 DJ 등을 떠올려봤다. 그런데, 그렇게 고민하다 보니 내 고민이 온전한 나의 고민이 아닌, 주변이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계산까지 포함된 고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런 꿈을 갖고 있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자신감이 서지 않았다. 자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우물쭈물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이 여태까지의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나 홀로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파르한처럼 자꾸만 의존하는 삶을 살다보면 위축되고 본래의 내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 방학을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적인 삶을 살기 위한 연습을 계획했다. 이 계획의 이름은 ‘혼자 돌아다니기’다. 난 집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귀찮아했고, 남이 계획 해주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계획하고 혼자서 돌아다녀보려고 한다. 작게는 서울의 이곳저곳 탐방하는 것부터 꾸준한 문화생활까지 최대한 여러 경험을 많이 함으로써 진로 탐색을 더욱 구체적으로 해 보려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런 경험들이 내 삶에 있어 혁명의 씨앗이 될 거라 믿고 있다. 

 영화 속에는 많은 명대사들이 등장하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세 얼간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알 이즈웰(All is well)'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길대로 걷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불안한 이유는 이 길의 끝이 과연 기존의 길보다 밝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 필요한 말이 알 이즈웰이다.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다. 내가 나를 믿어야지 누가 나를 믿어주겠는가. 우리는 삶 속에서 혁명을 꿈꾼다. 이 꿈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꿈꾸는 데서 멈추지 말고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주문을 외우면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란초가 아무도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라주가 자신을 구속했던 미신을 뿌리쳤던 것처럼, 파르한이 아버지에게 당당히 자신의 뜻을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란초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떻게 오늘을 살래?’라는 대사를 던졌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는 충분히 잘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잠시후 도착의 영화 <세 얼간이> 감상문 - 삶 속에서 혁명을 꿈꾸다 포스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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